서울 용산에 다시 연 민주화운동기념관
-민주화운동기념관을 가기 전 알아야 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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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관이 과거에는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는 사실 알고있어? 민주화운동기념관을 가기 전, 그 시절이 어땠는지 들여다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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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이후 내려진 계엄령이 우리의 역사 속 마지막 계엄령이야.(24년 계엄 이전) 18년의 독재를 유지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 정권 아래에서 시민들은 오랜 시간 민주화를 요구해왔어. 하지만 12.12쿠데타를 통해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이 권력을 차지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원했던 민주화의 꿈은 멀어졌지.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은 그들의 행보를 반대하는 시민들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게 돼. 이 과정에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도 탄생했지. 사람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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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은 민주화를 외치고 그들을 반대하는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해. 80년 8월 4일에는 ‘폭력배 소탕 작전’(국보위발표)이라는 이름의 특별조치를 발표해. ‘폭력배 소탕 작전’은 이름만 폭력배 소탕일뿐, 전두환정권을 반대하는 이들을 포함해 수많은 시민을 무고하게 잡아들였어. 그 결과, 단 열흘 만에 전국에서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잡혀갔어(80.08.15. 국보위발표). 그 중 2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은 이후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게 돼.
삼청교육대뿐 아니라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야만적인 고문이 실시된 장소가 있어.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이야. 이곳은 전두환 정권이 행했던 탄압 속에서 잡혀들어온 사람들을 야만적으로 고문한 공간이야. 물고문, 전기고문, 여성들에게는 성고문 등 여러 상상치 못할 고문들이 행해졌어. 비인간적인 고문이 행해지는 속에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 박종철씨가 강제로 연행되어 10여 시간 동안 불법감금을 당한 채 엄청난 폭행과 물고문, 전기고문 끝에 목숨을 잃게 된 사건이야. 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박종철이 심문을 시작한 지 30분 후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이후 시신 부검 결과로 수십 군데의 피멍과 고문 흔적이 드러나면서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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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은 자신의 폭압 통치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여러 정책을 펼쳤는데, 그 중 하나가 ‘3S’ 정책이야. 스포츠(80년대 스포츠리그 출범), 스크린(80년 컬러텔레비전 전국적 확대 시작), 섹스(80년대 에로영화, 저예산 영화 급증)를 통해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려했지. ‘3S’ 정책 외에도 신군부세력은 172개에 달하는 정기간행물을 폐간시키고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은 기자 700여 명을 해직, 학생들이 민주화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7.30교육개혁조치’를 통해 1천 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제적, 수백 명의 교수를 해직시켜. 또한, 언론사들에 ‘보도지침’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언급을 금지하는 등 특정 사실에 대한 보도 여부와 그 내용을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에 대해 일일이 지시했다고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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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를 위해 목소리 낸 사람들을 독재정권은 오히려 ‘폭도’, ‘폭력배’로 낙인찍고 대공분실로 끌고 가 고문을 자행했어. 그 시절 ‘남영동 대공분실’이 현재의 ‘민주화운동기념관’이 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사람들이 용기내 민주화를 외쳤기 때문이야. 다가오는 봄, 이 곳에 담긴 역사를 생각하면서 ‘민주화운동기념관’에 들러보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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