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대한민국에는 ‘서울의 봄’이라는 새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권력을 잡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맞서 전국적으로 대학생 중심의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발생하게 되었다. 신군부는 격렬해지는 민주화 요구를 누르기 위해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한순간에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이 꺾이는 것처럼 보였다.
항쟁의 서막 비상계엄 확대 다음 날인 5월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는 휴교령으로 학교 출입이 막히자 교문 앞에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군부는 이미 광주에 공수부대를 파견한 상태였다. 계엄군은 무방비 상태의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학생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그 모습을 목격한 시민들의 분노는 곧 광주 전체로 번져나갔고, 시위의 주체는 학생들에서 시민들로까지 확대되었다.
저항 광주의 중심가인 금남로는 계엄군의 과격 진압에 항의하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버스와 택시 운전사들이 차량을 들고 나와 시위대 맨 앞 줄에 섰고, 수십만 명의 시민이 “계엄령을 해제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계엄군의 무차별 집단 발포가 시작되었다. 그에 맞서 시민들은 인근 지역에서 무기를 찾아 스스로 시민군을 결성했고, 시민군의 저항에 밀린 계엄군은 일단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다. 평범한 이웃들이 눈 앞에서 총에 맞아 쓰러져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시민들은 생존을 위한 항쟁에 나섰다. 소중한 내 가족과 내 이웃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내 아이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시민군을 결성하고무기를 든 것이다. 고립 속 마지막 계엄군이 철수한 뒤 광주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고립되었다. 신군부는 언론을 통제해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했다. 5월 26일밤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다시 광주로 진입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시민군 지도부는 고등학생과 여성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27일 새벽 3시경, 도청 방송 스피커에서 울려퍼졌던 목소리를 끝으로 계엄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남겨진 사람들과 지금 우리의 이야기 결국 민주화를 이루어냈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폭도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혀 감시와 연좌제 속에서 숨어 살아야만 했던 유족들과 행방을 여전히 알 수 없는 실종자들의 가족들은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다리고 있다. 모진 고문과 투옥의 후유증으로 평생 신체적인 장애를 안고 살아가거나, 눈 앞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로 고통받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도 적지 않다. 게다가 오늘날까지도 크게 이슈가 되었던 모 기업의 5.18 비하 마케팅부터, 5.18을 가볍게 여기는 인터넷 사이트 이용자들까지 점점 사건에 대한 비하가 당연해지고, 비하성 발언들이 양지로 올라오고 있다. 나 자신을 넘어 내 가족과 이웃, 그리고 미래를 지켜내기 위한 사투를 벌였던 이들에게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가해가 된다. 지금 우리가 캠퍼스를 자유롭게 누비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투표를 하는 등 소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1980년 오월 평범한 광주 시민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받아낸 유산이다. 그날의 진실을 올바르게 기억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내고자 했던 1980년 오월의 항쟁을 생각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그해의 일들을 정의내려 보는 것은 어떨까?